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밀리 발라키레프 (문단 편집) == 음악 성향 == * 동양적 요소와 슬라브 지역색이 강한 낭만적이고도 개성적인 음악을 만들었다. 그의 대표작 대부분은 젊은 시절인 1850~1860년대 작곡된 것이며 공백기를 거쳐서 복귀한 1880년대 이후의 작품은 피아노 소나타 2번 정도를 제외하고는 주로 피아노 소품이나 가곡이다. 다만 이 시기에 젊은 시절에 작곡하다 중단한 미완성 곡을 완성하거나 개작하는 일도 했다. * 그의 작품 대부분이 피아노곡이며 그 외에는 2곡의 교향곡과 교향시, 관현악 서곡, 가곡 등이 있다. * 작곡하는 시간이 느리기로 유명하다. 교향시 타마라를 작곡하는 데 7년, 교향곡 1번은 36년, 피아노소나타는 무려 '''50년'''이나 걸렸다.[* 물론 진짜 50년 내내 작곡을 한 것은 아니고 기존에 완성된 곡을 여러 번 고치고 개작한 것이다.] 그래서 73살로 비교적 장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수가 많지 않다. 게다가 음악가로서 한창때인 30대에 공백기 까지 있었으니(..) * 발라키레프는 자신의 음악의 출판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생전에 출판된 곡이 많지 않다. 19세기말 이후 러시아에서 발라키레프 등이 추구했던 낭만주의 성향의 음악은 시대에 뒤떨어진 음악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는데[* 물론 현재에 발라키레프 음악을 구시대적이라고 평가하는 전문가는 없다. 어디까지나 당시의 인식이 그랬다는 것이다.], 이 때문에 발라키레프가 더욱 출판에 소극적이 되었다고 한다. * 상당히 독선적인 인물이었고, 자신이 지도자 역할을 맡지 않으면 성미가 안 차는 성격이었다. 그리하여 [[러시아 5인조]]의 첫 삽을 뜨기는 했지만, 훨씬 재능이 뛰어났던 [[무소르그스키]]나 [[알렉산드르 보로딘|보로딘]], [[림스키 코르사코프]]가 오늘날 족적을 남긴 것과 달리[* [[세자르 큐이]]는 이 세 명보다 존재감이 훨씬 미미하며, 평론가의 역할이 더 강했다.] 발라키레프는 별 음악적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다. 게다가 자신도 아마추어 수준이면서 자신에게 배우는 사람들을 아랫사람 취급하는 성격도 썩 호감을 얻지 못했는데, 일례로 그는 개성이 뛰어난 무소르그스키를 바보 취급하면서 음악에 대해 한참 배워야 할 사람으로 여겼다. 무소르그스키의 재능이 빼어남을 처음부터 간파하고 평생에 걸쳐 그의 작품을 재조명하는 데에 힘쓴 림스키 코르사코프와는 대조되는 부분. * 자신에게 배우는 처지였던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이후에 [[청출어람|러시아 음악계의 지도자로까지 올라가자]], 그와도 절연했다고 한다.[*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데뷔 25주년 연주회가 성대하게 열리자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옛 선배인 발라키레프를 초대하였고, 발라키레프는 씹어버렸다. 참고 참아왔던 림스키 코르사코프도 다시는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.] 발라키레프가 고난을 겪을 때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그의 재기를 위해 힘쓰고 배려했던 것을 감안하면, 순전히 그의 속 좁은 면모 때문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